역에서 나는 맨귀로 다니는 적이 거의 없다. 내 귀에는 어김없이 이어폰이 꽂혀 있기 마련이다. 내가 '아이팟, 나에게 음악을 들려줘'라는 주문을 외우면 내 손은 알아서 플레이 버튼을 눌러 내 귀에 음악을 주입시킨다. 이것을 나는 '전자동 몸시스템'이라고 명명했지만 사실 아무렇게도 부르진 않고 있다.
어제도 나는 전철을 탔다. 밤 10시30분을 조금 넘긴 시간이었고 나는 적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내 옆자리에도-자리가 넉넉한 탓에 한 사람 정도 앉을 수 있는 여유공간을 두고- 어떤 여자가 이미 앉아있었는데 줄곧 고개를 숙이고 졸고 있었다. 물론 처음에 나는 그 여자가 졸거나 말거나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에 그 여자에게 신경써야만 될 일이 나에게 생겼다.
그 여자는 졸고 있는게 아니라 고개를 숙인채 울고 있는 것이었다.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눈가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아이팟, 음악 소리를 줄여줘.' 나는 다시 주문을 외웠고 내 손은 그 주문을 실행에 옮겼다.
순간 쿨한 내 마음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말랑말랑해지더니 점차 그 주변부터 녹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의 눈물은 모든 것을 녹게 하는 위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어느샌가 전철 바닥이 말랑말랑해져 있었다. 그것뿐인가. 천정에 매달린 둥근 손잡이 끝이 조금씩 녹아드는 것도 보였다.
어떤 이유인지 나는 모른다. 실연? 가족의 죽음? 우울증? 그냥 여기 저기 물음표들이 떠다닐 뿐이다. 그리고 내가 내려야 할 역이 다가왔다. 그러나 나의 발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전철 바닥은 이미 녹아서 끈적끈적해져 있었다.
"왜 울죠?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혹시 제가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라고 말을 걸어볼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렇게 낭만적이지 못하고 쿨하므로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한 행동이란 고작 손수건 하나를 그녀의 무릎위에 올려놓고 황급히 자리를 뜬 것이 고작이었다. 물론 전철 바닥이 하도 질펀하게 녹아 힘겹게 발걸음을 옮겨야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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